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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이 감도는 바위 벼랑을 마주보며 서 있는 '병산서원'

Travel Story./경상도,부산,울산

by 멀티라이프 2009. 12. 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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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하면 생각나는 서원 두개를 적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적을 것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졌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기억속에 병산서원의 모습은 전혀 없는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께 물어본결과 병산서원은 어릴적에도 간적이 없는 곳이란다. 어릴적 기억이 뭐 그리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지만, 어릴적이 가본적이 있는 도산서원을 갔을때는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음을 느꼈었다. 잠재의식속에 있는 사람의 기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겨울에 방문한 병산서원은 주변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돋보였다고 할 수 있을것 같았다. 이 곳은 본래 풍악서당이라 하여 풍산현에 있던 것을 서애 류성룡이 선조5년(1572)에 후학 양성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서애 류성룡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는 유림에서 사묘를 짓고 향사하기 시작하면서 명문 서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회마을에서 화산을 넘어 낙동강이 감도는 바위 벼랑을 마주보며 서 있는 병산서원은 그 절묘한 경치와 뛰어난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낙동강을 마주보며 2백명은 넉넉히 앉을만한 만대루를 비롯해 광영지, 입교당, 존덕사, 장판각 등은 서원의 향취를 듬뿍 느끼게 해 줄뿐만 아니라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서원으로도 유명하다.


 병산서원 주변은 잔디밭과 함께 조경이 잘 되어있다. 아마도 현대에 와서 새롭게 단장을 했을텐데 전통이 묻어있는 병산서원과 제법 잘 어울린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일반적으로 삼문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이 문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입교당 중건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고 한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인 만대루는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의 모습..


 옆에서 담장넘어 바라본 만대루의 모습..


 이 건물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이다.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강론을 했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강당의 동쪽방인 명성재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며, 서쪽 방인 경의재는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강당 정면에 서 있는 석조물은 밤에 불을 밝히던 정료대이다.


 만대루에서 바라본 입교당의 모습..


 입교당 뒷편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동재, 서재..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곳으로 유생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동재에 기거 하였다.


 장판각의 모습..


 존덕사의 신문과 전사청으로 가는 작은 문을 함께 담아보기도 하고..


 신문이 자물쇠로 잠겨있어서 문 사이로 찍은 존덕사의 모습..


 전사청의 모습..







 병산서원 또 하나의 명물인 달팽이 모양의 화장실..


 만대루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절벽의 모습..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절경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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