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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 강화도 광성보

Travel Story./인천,경기도

by 멀티라이프 2010. 2. 2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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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반만에 다시 찾은 광성보는 변한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조금 달라진것이 있다면 조경에 조금더 신경을 쓴것 같았다. 광성보는 조선 1658년(효종 9년)에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와 함께 축조하여 이에 소속시켰다. 신미양요 때(1871년)는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격전의 현장으로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적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ㆍ황해도ㆍ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사진속의 모습처럼 복원 설치 되었다. 대포는 홍이포라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되는 차이가 있다. 전시된 3개중 제일작은 것은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외 59명의 순절비이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과, 사졸 53인의 전사자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51인의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순돌목 돈대는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모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정책으로 숙종은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1874년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순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다.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파괴 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 하였다. 








 용두돈대는 강화해엽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잇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ㆍ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인조 5년(1627), 후금(청)이 쳐들어 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손돌은 죽었고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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